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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사람들은 무엇 하나,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역할을 하나씩 맡는다.
한시간 4000원 남짓한 지폐를 꼬깃꼬깃 지갑에 채우기 위해 
고객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주문에 맞춰 머그에 아메리카노 그득히 채우는 종업원이나,
잔을 감싸 향을 음미하며 내 옆에 앉아 이번엔 타인 1과 2를 자처하는 사람들.
제각기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여 옹기종기 다신 되감지 못할 짧은 단막극 하나 찍어간다.
정해진 대본도, 카메라도 없이 카페의 불그스름한 조명과 창밖 네온사인 불빛에 의존해 
배우들의 목소릴 속으로 꿀렁 삼켜 녹음해낸다.
각자의 의지와 기억에 의존해 상대배우를 떠올리고, 언제 어디서 느닷없이 주어질 역할에 무의식이 잔뜩 쪼그라든 채,       
그렇게 한 씬 찍어낸다.
조연 하나 없는 무대 위 문득, 난 어떤 역을 맡아 서 있는지 생각해 본다.
때론 손님으로, 또 타인으로, 직원으로, 혹은 밤길 위험한 취객으로.
애초에 대본 없는 연극, 하지만 뚜렷한 역할 없이 불안히 앵글 안을 서성이기만 하는 배우.
애초에 NG 없는 촬영, 하지만 더듬더듬 문장을 짜집고 삐뚤빼뚤 걸어나가는 배우.
하지만 그렇기에, '길을 찾아 방황하는 수많은 청년 중 하나' 라는 역을 당당히 맡아 연기하는 배우.
정해진 것이 밤하늘 보이는 별 만큼이나 없기에 하나하나 즐겁고도 심심한 인생 녹여낸다.
되감지 못할 필름은, 끝없이 쉼없이 감겨만 간다.